NOTICE 
신의 존재에 대한 글과 논쟁 댓글 뒤에 적었던 마지레스 댓글. 다원화만큼 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개념이 없다. 최근들어 개신교가 가장 공격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주장하시는 바를 초월해서 현대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수많은 과거의 유산과 새로운 사고, 과학이 융합되어 혼재된 수많은 주장이 그자체로서 받아들여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필자님을 포함한 덧글의 모든 분들의 의견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면, 세상은 그러한 서로의 생각에 대해 존중하고-반대로 말하면-더이상 터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원화사회죠.

아시다시피 종교, 특히 강한 결속력을 지니는 종교는 다원화와 친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통하면 선과 악이 나눠지고 죄의 구별이 명확합니다. 따라서, 미래와 종교라는 키워드는 상호배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신앙을 가진 현대인들은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종교의 틀안에 고립되거나 외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필자께서 말씀하셨듯이 비종교인 역시 세상의 이치(신의 존재는 종교인의 용어입니다.)를 깨닳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원화사회의 혼재된 원리들 속에서 위의 분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과학과 적절한 종교의 씨(전도서2:11)가 섞여-혹은 한쪽만으로- 자신이 납득할 만한 철학으로 세상의 이치를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위 댓글에도 있지만 대략 아래와 같은 키워드로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 신의 유물론적 존재유무(신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나? 혹은 실존하나?)
- 신의 계획(세상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랜덤하게 흘러가나, 아니면 계획이 있나?)
- 진화론 vs 창조론(진화론을 믿는(!) 무신론자, 진호론을 옹호(!)하는 유/무신론자, IDT를 옹호(!)하는 유/무신론자, 창조론을 믿는(!) 유신론자, 기타)
- 인간이 가진 종교의 씨, 그것은 신의 존재의 반증인가? 아니면 교육/경제능력이 떨어졌던 과거의 유물로서 사라져 가는가?

종교의 논쟁은 칼로 물베기 같지만, 현대 종교인이라면 위 키워드에 대해 소신있게 설명할 수 있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의 코드로 복음을 증거 하는 시대를 지나 다원화사회에서도 자신있게 자신이 믿는 신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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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드인 배틀스타 갈락티카가 시즌 4, 20화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한국에선 그다지 유명하지 않을 뿐더러 미국에서도 매니아층의 드라마에 가까운 이 SF 드라마는 1978년 동명의 드라마를 리메이크하면서 시즌 4까지 이어왔다. SF 드라마의 왕언니격인 '스타트랙'의 아류격이라고 생각하며 보기 시작했던 나는 이제는 단연코 이 드라마는 스타트랙과는 차별화된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할 만큼 빠져들었다.


갈락티카의 특징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SF드라마가 가지는 특성인 '미지의 세계'나 '외계 지적생명체'에 대한 탐험과 대립이 없다는 것이다. FTL이라 부르는 순간이동장치를 통해 우주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는 그들이지만 한번도 입이 튀어나오고 발 다리가 3개씩 달린 우주인은 등장하질 않는다. 인간이라 불리는 드라마의 주인공 종족은 실제 '지구인'이 아닌 코볼에서 떠난 12종족으로 우리 입장에서는 외계인에 가깝지만,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고 많은 문화 사회적 부분이 인간과 유사점을 갖는다. (이유는 드라마 말기에 나온다) 또한, 인간이 창조한 사일런이라는 기계생명 역시 진보된 버전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닮아 있다.

두번째 주목할만한 점은 '신'과 '신의 계획'에 대한 비중이 높다. 높은 정도가 아니라 이 드라마의 핵심 주제라고 봐도 되는데, 자신이 창조한 사일런에게 공격당해 인류은 개체수 4만명 이하의 절체절명의 멸망 위기에 봉착한다. 살던 별, 친구, 그리고 가족을 모두 잃은 인류는 희망을 잃고 사일런의 추가 공격을 받으며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기적과도 같이 그들은 다양한 이적으로 통하여 알게된 13부족, 즉 전설 속에 존재하는 행성인 '지구'로 이주하려는 꿈을 꾸게 된다. 드라마의 대부분의 내용은 '지구'를 찾아 광야와 같은 우주를 돌아다니는 내용이다. 광야 생활 중 그들은 끊임없이 믿음의 좌절, 길잃음 등을 경험하게 되며, 신의 계획과 신의 존재에 대해 흔들리는 믿음을 보이곤 한다.

마지막 편에서-가능한한 스포일링을 자제하면서-일어나는 결말은 신은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각자 그들이 소원하던 일들이 이뤄지면서 끝이 난다. 예상했던 형태나 방법이 아니었지만 의문점으로 남겨졌던 신의 계획의 큰 맥락과 이적의 실재가 밝혀지며 대단원의 막은 내린다.

이 SF드라마는 고도의 과학과 종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 미래의 종교상을 보여준다. 드라마 속 인간은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들 수 있는 경지까지 올라와있지만 자신의 운명 앞에서는 여전히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이 터치하는 영역과 종교가 터치하는 영역이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SF 매니아에게 이 개념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 같다. SF가 매력적인 이유중 한 부분이 인간이 DNA적 차원에서 부터 부족한 점을 기술이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인데, 먼 미래(혹은 먼 과거)에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힘들어 하는 지적존재를 관찰한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스타트랙과 갈락티카에서 2가지 대조적인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스타트랙의 피카드 선장 시절, 과거의 것으로 보이는 미지의 물체로부터 냉동되어 있던 인간들을 발견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에피소드가 흥미로웠던 것은 냉동된 인간들이 서기 2000년 전후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우리의 시각에서 스타트랙의 세계관을 디테일하게 비추어보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인간들은 어떠한 물질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에 매료된다. 무한한 금과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품지만, 이미 무한한 재화를 생산할 수 있음으로 인해 물질적 부자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피카드 선장은 담담하게 이미 모든 인류는 물질에서 자유로우며 불치병도 없는 시대라는 것을 그들에게 설명한다. 인간의 욕심이 더이상 불화나 전쟁을 일으키지 않다는 사실도 전한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 세계인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갈락티카의 세계에서 인간과 사일런들은 그들이 가진 풍요에 만족하기보다 그들의 나약함을 저주한다. 시즌 4, 15편에서 사일런 1호와 그의 창조주가 나눈 대화를 들어보자.
오랜 여행을 하는 동안
초신성을 본 적 있나?
없어
없다라...
난 봤지
별이 폭발하고 우주의
기초가 되는 걸 내보내는 걸 봤어
다른 별, 다른 행성, 마침내 생명까지
초신성
창조물
난 거기 있었고. 보고 싶었지
그 순간의 일부가 되고 싶었어
우주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그 현상을
내가 어떻게 봤는지 알아?
내 두개골을 둘러싼
바보 같은 젤라틴 안구로 봤지
전자기 스펙트럼 중 조그만 단편만
감지하게 만들어진 눈으로
공기 중의 떨림 밖에
듣지 못하게 만들어진 귀로
우리 5명은 널 최대한
인간과 가깝게 만든 거야

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감마선을 보고 싶고
X선을 듣고 싶어
난...
난 암흑 물질의 냄새를 맡고 싶어
나 자신의 모순을 알겠어?
제대로 표현조차 못 하고 있잖아
복잡한 생각을 개념화해서 바보같이
한정된 언어로 표현해야 하니까
뭔가를 잡을 수 있는 이런 손보다
다른 것으로 잡고 싶고
나를 타고 흐르는
초신성의 태양풍을 느끼고 싶어
난 기계야
더 많은 걸 알 수 있고
더 많은 걸 경험할 수 있는데
이 불합리한 몸에 갇혀 있잖아
왜냐고?
내 5명의 창조주는 신이
그렇게 하길 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우주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한들 우리는 유한한 두개골로 둘러쌓여 젤라틴의 안구로 세상을 보는 서브셋일 뿐이다. 모든 것을 안다 한들 만질 수 없으며, 모든 것을 본다 한들 느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배틀스타 갈락티카는 Sci-Fi를 통해 혼탁한 현재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배틀스타 갈락티카 홈페이지

배틀스타 갈락티카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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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안의 신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존 호트 (지식의숲,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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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상징(우리시대의고전 5)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폴 리쾨르 (문학과지성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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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이루어지는 세상에 사는 꿈을 꾸었다.

뭐든지 이루어지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꿈에서 깨었다.

理想(이상)은 虛象(허상)으로 귀결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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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이라는 지점에 진실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진실은 진부합니다.
진실은 상호복합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날 보수가 101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101은 진실보다는 자극적이었으며 방향성이 있었고,
대중은 101이라는 소식에 반응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진보는 당황했습니다.
대중은 진실보단 101에 열광했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분했습니다.
진실을 아무리 외쳐도 진실과 보수의 말이 섞이면
100보다 큰, 왜곡된, 진실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에

진보는 98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98은 보다 자극적이며, 101의 보수의 치우침을
적나라하게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진보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비록 진실에 벗어난 소식을 전하더라도
보수의 왜곡된 소식과 합쳐졌을때 진실에 가까워질꺼라고
국민들의 삐뚤어진 시각을 바로잡기 위한 왜곡이라고

보수는 진보가 보다 왜곡된 소식을 전하는 데 분개하여
103을 전했습니다.

진보는 96을,
보수는 105를,
진보는 94를
보수는 107을,

누가 시작했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누가 더 왜곡하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현재 당신들 진실을 전하는 언론이라 부를 수 있을까?

흥분하지 않고 묵묵히 사실을 전하는 언론을 기대하는 것은 환상일까요?

P.S.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 위한 뉴스의 빈정대는 말투가 너무 짜증납니다. 이제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용기도 빨갱이를 색출하려는 애국심도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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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인생은 로켓과 같아 보였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곳으로 날아가면 그만이겠죠.

남들과 비교되기 시작한 학창시절,
인생은 계단과 같았습니다.
남을 딛고 올라서면 좀더 높은 위치에 설 수 있겠죠.

큰 꿈을 품고 사업을 시작하던 20대,
인생은 연어와 같아 보였습니다.
세상의 풍파를 거슬러 내가 원하는 걸 하면 그만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거스르지 못할 두 가지가 나의 인생에 들어왔습니다.

사랑이 들어온 그때,
인생의 주체는 '내'가 아닌 '우리'가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을 위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불가능이 들어온 그때,
저는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물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불가능이었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 우리의 인생은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내가 주체인 삶에서 가치를 가질 수가 없어졌습니다.

신을 만나던 그때,
저는 제 자신을 내려놨습니다.
인생은 가불가를 초월하여 신의 계획 하에 있습니다.

사랑과 불가능은 아직도 저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마 평생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목표, 경쟁, 도전, 사랑, 불가능, 그리고 신
저는 뒤를 돌아 제가 걸어온 길을 봅니다.
인생은 제가 걸어온 그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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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 민족은 이름과 같이 하나의 단일 민족이었지만,
사는 곳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5/1948년 8월15일
일제강점에 시달리던 한민족은
드디어 일제가 2차대전의 패전함에 따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일본 건국문화의 원천이라고 자부하는 한민족이
일본의 야욕으로 말미암아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스러운 사건을 겪었고
자주독립이 아닌 또 외세에 의한 독립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화성에 살고 있는 진보는
이러한 치욕을 잊지 말자고 생각했고
그날을 '광복절'로서 해방의 기쁨과 일제강점기의 치욕을 되새기는 날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금성에 살고 있는 보수는
나라의 태동에 '치욕'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보다는 나라가 세워진 날로서의 긍정적인 키워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날이 '건국일'이기를 원했습니다.

1950년 6월13일
어찌된 운명인지 해방 후 똘똘 뭉쳤던 한민족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념에 공명했습니다.
북에서는 평등의 이념이 남에서는 자유의 이념이 흘러나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재산을 잃게 되었습니다.

화성에 살고 있는 진보는
해결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북의 이념과 남의 이념 사이에 타협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모든 것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금성에 살고 있는 보수 역시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전통적인 '부'를 전면 부정한 북의 이념 속에서 자비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모든 것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보수는 또한 다짐했습니다.
이상론으로 세상을 바꾸거나 만민이 모두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불평등하더라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소득수준을 높이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1950/1960/1970/1980
1950대 반으로 갈라진 남의 한민족은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아프리카 난민과 다름이 없던 그 시절, 잘 살아보겠다고 모두들 열심히 뛰었습니다.
못살던 그때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밥 굶지 말고 살아보자였습니다.

금성에 살고 있는 보수는
정신 없이 뛰었습니다.
자원 없고 작은 땅덩이에서 이겨보려면 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낙오자가 생기고 사람 몇 명 죽었다고 해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부강만을 외치며 뛰고 또 뛰었습니다.

화성에 살고 있는 진보는
정신 없이 뛰던 어느 날 생각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는 돈 버는 것 이외에 다른 많은 생각해야 될 것들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낙오되는 사람을 돌봐주고 잘못된 방법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데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성에 살고 있는 보수는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의를 몰라주는 진보가 미웠습니다.
반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진보의 계획이 미더웠습니다.
그들의 계획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잘사는 세상을 꿈꾸는 빨강냄새가 난다고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화성으로 쳐들어가 진보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금성에 살고 있는 보수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정신 없이 뛰는 동안 희생된 많은 것들과
반대하던 진보를 짓밟았던 업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 당시의 필요악이었다고

화성에 살고 있는 진보는
보수가 행한 만행으로 인해 더 이상 보수를 선의의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빨강 옷을 입히고 잔인하게 짓밟던 보수는 정죄의 대상일 뿐입니다.
보수가 잘못했던 모든 것들을 밝혀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은 나라의 뿌리 밑둥이까지 혼탁하게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지켜온 나라를 향해 '이 거지같은 나라'라고 침을 뱉어야 할까요?

1990/2000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마지막 힘을 짜내서 끝까지 달려 '선진국'이라는 대열에 들어서느냐,
아니면 이제부터 뒤를 돌아보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데 주력하느냐,

금성에 살고 있는 보수는
좀더 뛰자고 제안합니다.
아직 멈출 때가 아니라고
멕시코나 브라질처럼 되지 말자고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GNP 4만불 시대에 해도 늦지 않다고,

화성에 살고 있는 진보는
이제 주위를 둘러보자고 말합니다.
더 이상 외면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걱정해야 할 때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로 이 모든 것을 외칠 수 없을까요?
무너진 바빌론의 탑과 같이 이것은 세상의 이치일까요?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지적하고 보완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당신은 화성에 살고 있나요? 금성에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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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근영 가족의 좌익성향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떠오른 생각.
사회적으로 우리가 처한 정치적 상황, 경제적 상황에 대처하거나, 혹은 미래의 비전을 정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갈등을 하고 논쟁을 벌이며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한다. 요즘 한국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갈등이 제각각 명확한 색을 내지 못하고 재잘거리는 혼탁의 안개 속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혼탁한 이데올로기들은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관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뜬 구름 잡는 얘기 같아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빨갱이"라는 키워드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나는가?

이 키워드를 듣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된 이데올로기에 따라 제각각의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옆 사람 혹은 넷상에서 이 주제에 대해 얘기를 해본다면 각양각색의 말들이 튀어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6.25 전쟁의 아픔과 북한군의 만행을 몸소 체험한 세대의 직접적인 느낌
  • 민주화 도중 민중 탄압의 도구로서 사용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세대가 가지는 부정적인 느낌
  • 반대로, 남한의 친북세력이 남한을 적화통일시킬 것 같다는 불안한 느낌
  • 대남공작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한국에서 발생했던 북한 무장공비 뉴스에서 떠오르는 느낌
  • 시대가 흘러 대남공작 같은 말은 유명무실하지만 현 사회체계에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정적인 표현으로서 사용되는 느낌
  • 같은 대상에 대해 현 시대에도 적화통일을 바라며 김정일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가지는 느낌
  • 통일의 방법에 대해 온화함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부류를 지칭할 때의 느낌
  • 진보성향의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서의 느낌 등...
이러한 느낌들은 개인적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가오며 완벽하게 다른 뜻이다. 그렇다면, 이 키워드에 대해 일례로 대화를 구성해보자.

A: 요즘 인터넷에 빨갱이들이 너무 많아.
B: 정말이요? 요즘 정부에선 빨갱이 안 잡고 뭘 하는 거죠?
C: 뭔소린지...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딧다고...

A, B, C가 같은 키워드로 얘기하지만 사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잘못된 정보만을 서로 공유한 셈이 된다. A가 의미하는 빨갱이는 급진적인 진보세력을 가리킨다. B는 그 말을 받아 사회전복을 노리는 대남공작원을 뜻한다. C는 그러한 키워드가 사용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려는 바는 이중에 누가 옳고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다. 빨갱이라는 키워드는 사라져야 한다라던가 기본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논지는 사회 전반적으로 흐르는 이러한 혼탁성을 논하려는 것이다. 위 예에서도 비약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교류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키워드를 자신의 그림에 맞추어 세상을 보게 되어 더 큰 갈등을 초래하거나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필자는 다양한 계층이 가지는 혼탁한 키워드를 분류 정의하는 글을 써보려 한다. 최근 이슈가 됐던 노무현-심상정의 논쟁만 봐도 혼탁한 키워드를 사용하여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행간의 목적으로 봐서는 서로 모르고 하는 행위는 아닐 것이지만)

당장에 자신이 옹호하는 사회단체의 반대세력이 무슨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나? 그들의 두 눈에는 '잘못'된 탐욕이 가득하며, 아무런 비전도 없이 반대만 하거나 사회전복같은 극단적인 것을 원하거나, 정신이 나가서 혹은 '멍청'해서 척 봐도 안될 것을 밀어붙이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물론, '잘못'된 것을 행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잘못인가 아니면 논쟁 가능한 부분인가를 인지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잘못을 탓하는 것과 논쟁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당장, 진보에서 원하는 나라의 비전과 보수에서 원하는 나라의 비전을 알고 있는가? 사회주의로의 회귀 아냐? 라던지 부자들만 잘 사는 나라겠지. 라고 한다면 당신이 가진 세상에 대한 디테일을 한참 떨어져있다고 평하겠다.

필자 역시 공학도로서 시사적인 부분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며 무언가를 가르칠 입장은 아니다. 다만, 나만의 색을 발휘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색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이 보다 사회를 통찰력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며 노력하고 있다. 다만 그 방향이 다르고 입장이 다를 뿐이다. 나랑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부정성 뿐만 아니라 긍정성을 이해하고 인정했을 때야 비로서 정반합(正反合)이라는 발전적인 흐름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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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인간의 특수성

3.1. 지적 생명체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다른 동물들은 모두 같은 동물이다. 영장류라는 불리는 영장목의 포유류로서 인간은 원숭이와 같은 목에 속한다. 지적 생명체라는 주제처럼 지성을 가지는 생명체로 관점을 좁혀봐도 인간은 그리 특이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인류학에서는 인간이 다른 짐승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진다고 한다. (비 전문화된 육체 기관, 늦은 성장속도, 환경에 개방되어 있는 존재) 하지만, 인간다움, 사람다움의 패러다임은 신체적 특징 보다는 내적인 특징이 크다. 아래는 철학적 인간학에서 제시하는 인간다움의 패러다임이다. (From encyclopedia)

인간적인 것 또는 사람다움의 패러다임

① 생물학적으로 비 전문화되어 있다. ② 물음을 묻는 존재(지성 또는 이성)이다. ③ 문화의 창조자•피조자이다. ④ 자유의지를 가진 윤리적 존재이다. ⑤ 고유한 내면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 ⑥ 이해를 초월하는 탈중심성을 가지며, 불편•부당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⑦ 유토피아 의식을 가지며 미래지향적이다. ⑧ 사회적 존재이다. ⑨학습존재이다. ⑩ 상징적인 존재이다. ⑪ 종교적인 존재(기도•희망•사랑)이다. ⑫ 수치를 아는 존재이다. 이 패러다임들은 서로 배타적•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중복되어 있다.

이 같은 특징은 인간의 인간적임을 정의하지만 또 다른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특성들을 갖기 위해선 뛰어난 지적 기억력과 사고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멸종 위기 동물을 보호하려 하거나, -엄밀히 말하면 진화에 도태된- 소외된 개체에게 연민을 느끼고 도와주려 한다던가 하는 행위는 지성만 가지고 설명하기엔 부족한 뭔가가 있다. 인류학이나 진화론에서 일부 학자들은 대의적인 종족 보호 차원에서 행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인류는 수많은 분야에서 종족보존의 차원을 넘어선 무언가를 하고 있다. 때로는 넘치는 보호와 사랑을 베풀기도 하고 때로는 종족보존에 위배되는 많은 행위를 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아담이 지혜의 사과를 먹고 천국에서 쏟겨나는 장면은 인간이 가지는 불완전성을 잘 표현해주는 한 예이다. 만일, 그 사과를 먹지 않았다면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신과 같은 완벽함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과를 먹은 것이 인간이며, 그로 인해서 인간은 뛰어난 지혜와 함께 불완전성을 가지게 된다. 혹자는 그 사과를 먹게한 것 역시 신의 계획일텐데 신이 인간에게 뭐하는 짓이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는데, 후반부에 언급하겠지만 이 사건(혹은 비유)은 인간과 신의 관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영혼의 존재, 영원에 대한 마음

그렇다면 영혼의 존재는 어떠한가? 많은 유신론자들과 일부 불가지론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구별하는 큰 특징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것은 불가능하고 유물론적으로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딱 한가지 성질만을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구약성경 전도서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 있는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가 그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인간다움의 패러다임에서도 그렇듯이 인간은 선천적으로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성향이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 조차도 영원을 사모하는 반증이며, 종족번식에 전혀 도움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영원함에 대한 표현을 종교나 예술적인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고 있다. 유령이나 영혼을 믿지 않더라도 인간이 유물론적인 특징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3.2. 존재의 의미

인간의 특수성

필자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논쟁을 벌여야 할 지점은 다름아닌 이곳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특별한가? 여기서 특별이라는 것은 단순히 먹이사슬의 최상위자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종속과목강문계 분류체계 속에서 영장목의 하위가 아닌 인간과 다른 생명체로 나뉠 수 있는 "특별"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혼"의 유무로 설명될 수 있을까? 아니면 과학의 발전으로 이 의문점이 해소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먼 미래로 여행을 떠나보자.

인류의 패러다임을 복제한 인류

우리가 도착한 미래에는 게놈지도가 발견된 이상의 발견이 이루어져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생각하는 뇌의 사고체계를 모두 해석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기존의 기계가 하지 못하던 인간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기계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계는 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성명을 내고 반대하지만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은 인간과 똑같은 패러다임을 지니는 로봇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인간과 같은 패러다임을 가지는 로봇은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 이 순간-아직 다른 외계 지적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면-인간은 신을 모습을 닮은 유일한 존재인가 아닌가? 이 같은 존재를 창조한 인간은 신으로 불릴 만 한가? 전자의 질문들은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 넘어가도록 하고 마지막 두 질문에 포커스를 맞춰보자.

인간은 신의 모습을 닮은 유일한 존재인가? 아닌가?

첫 질문은 불행히도 "아니다"가 되겠다. 물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인간다움을 복제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것도 개체단위가 아니라 사회단위가 되었을 경우에도 인간이 가지는 개체의 다양성과 이로 인한 사회현상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가 붙는다. (따라서, 성적본능이나 번식 역시 같은 형식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아닌 경우도 같은 특징을 가질 수 있다면 괜찮지만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됨) 분하고 억울한 일이지만 같은 패러다임을 가진 다른 개체에 대해 열등하다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신의 능력, 인간의 능력

그렇다면, 이를 창조한 인간은 신의 능력을 얻은 것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능력 중 큰 부분을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집합론으로 보자면 신이 만든 세상의 모든 이치를 O라고 봤을 때 인간이 가진 기존의 능력 Ae와 자신을 닮은 존재를 창조하는 능력을 Ac라고 한다면 Ae∪Ac가 되는 것인데, Ae∪Ac = O가 되지 않는 한 인간이 신의 능력을 얻었다고 자만하기는 이르다.

더더우기, 인간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발견이다. 창조가 아니다.
복제이다. 창조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신이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조금 다른 얘기긴 하지만,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에서 공감가는 문구가 하나 있었는데,

"인간은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생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유기물은 생명체로부터 재가공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가진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그 능력을 창조자를 통하여 받았고 그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이 최종적으로 O에 이를 수 있다 쳐도 그것은 이미 창조된 세상의 이치를 발견한 것뿐이다. 만일, 이로 인하여 인간이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고 거기에 같거나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는 기존 창조주가 했던 일을 복제하고 개선한 이상의 값어치를 가질 수 없다.

인간다움, 그 중요성

이런 식이라면 유신론자들이 과학과 부딪힐 일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과학을 통해서 벌어질 일중에 경계해야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는 것이다.

또 다른 미래로 가보자. 그 미래에서는 신기한 기술이 개발되었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쁜 습성을 DNA에서 제거할 수 있는 기술이 그것이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수많은 범죄와 정신적 장애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모두가 유토피아와 같은 완전한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좀 인위적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한 세대만 이렇게 지내면 이후 자손들은 유전적으로 유지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그런 세계다. 정말 그럴까? 필자가 느끼기로는 인류가 역사상 처했던 모든 위협보다도 무서운 공포로 받아들여진다. 왜일까? 이것은 신이 인류에게 준 근본 계획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P.S.1. 인간의 패러다임을 모두 얻은 미래 세계는 "우주소년 아톰"과 "I, Robot"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인류는 먼 미래에 창조할 피조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인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S.2. 마지막에 언급한 미래는 영화 이퀄리브리엄에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스토리상 DNA에 손을 대지는 않았고, 부정적인 현실에 치중했습니만, 제가 다루려고 하는 시나리오는 그것보다 달콤하고 부정적 요소가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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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창조

지난 줄거리

지난 1부에서 우리는 시간의 양극단에 존재하는 신에 존재에 대한 두 개의 확실성을 찾아보았다. 첫 번째는 극단의 과거에서 발견된 "신을 섬기지 않은 고대 문명은 없었다."이며, 두 번째는 극단의 미래에서 가정한 인류가 잃어버린 신의 존재 즉 "무신의 이상상태"였다. 인류의 시작과 끝에서 찾은 이 두 점을 기준점과 함께, 이번 편에서는 세상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 그리고 융합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대립'이라는 키워드로 대변될 수 있었다. 인류가 가진 호기심은 상상의 영역 혹은 성전의 정의로 짜여 있던 세상의 틀을 하나 둘씩 깨기 시작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와 과학의 가장 큰 대립 각은 '창조'에 관한 부분이다. As-Is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지금 종교에서 주장하는 '창조론'은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종교가 그를 말살시키려는 과학의 사도들을 향해 겨누고 있는 단 한발의 화살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창조론은 모든 종교인이 가진 생각을 대변하는 단 하나의 정론인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하면, 불행히도 필자는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반기를 들겠다. 세상이 6000~8000년 전에 시작됐다고 증명하기 위해 고고학과 과학의 기본적인 원리인 방사성 탄소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측정법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편적인 과학-모든 과학의 공식은 가설의 일부지만 거의 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레벨의 과학-의 범주로 봤을 때 너무 억지스럽다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나중에 더 자세히 포스팅 하겠지만 진화론의 경우도 아직은 진화의 메커니즘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창조론을 옹호한다는 연유로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하거나 반대로 밝혀질 경우 신의 영역이 침범 당한다던가 하는 주장에 역시 반기를 들겠다. 과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밝혀졌을 때도 종교인들은 심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겠지만 세대를 넘어 거시적으로 봤을 때 어떤가? 종교의 믿음과 세상의 이치에 대한 믿음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무한의 공간, 시간 그리고 신의 Coverage

종교와 과학의 싸움을 멈추고 이제는 융합의 길을 모색해보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대변되는 현대 물리학은 우주의 시작과 역사 그리고 끝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특히나 우주의 광대한 스케일은 기존에 신들이 행하던 수많은 기적을 무색하게 하는 웅장함이 있다. 고대의 작은 촌락을 수호해주던 토테미즘의 신으로부터 서양문화를 이끌어온 기독교의 예수까지 신이 수호하고 컨트롤하는 영역은 점점 커졌지만, 어느 법전에도 지구는 신이 창조한 광활한 세계의 티끌 정도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어놓고 있지는 않다. 과연 신의 coverage-커버영역, 특히 보험의 수혜범위를 지칭하기도 한다-는 어디까지일까? 여기에 대해 좀더 깊이 들어가자면 종교에서 파생되는 경전의 coverage를 짚어둘 필요가 있다.

신의 말씀, 기록의 주체

고대 종교와 현대 종교를 구별 짓는 기준이기도 한 경전은 신의 말씀을 적어놓은 책이다. 여기에는 그 종교를 믿는 종교인들이 삶을 사는 기준이 적혀있다. 그런데 이 밖에도 경전에는 그 종교가 가지는 세계관에 대한 부분이 기술되어 있다. 성경의 경우도 창세기를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을 일주일간의 여정으로 비유해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질문하나. 이 경전을 기술한 자는 인간인가 신인가? 특수한 경우-구약성경의 십계명같이 돌판에 신이 직접 새기는 경우-를 제외 하고는 대부분 인간이 기술한 내용이다. 그렇다고, 경전이 가지는 신성이 위협받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신이 인간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문화적 배경, 과학적 지식 이상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올시다 이다.

신의 말씀, 지시인가 지식인가

신이 인간에게 하사하는 메시지는 지시인가 지식인가? 물론 다양한 종교의 다양한 경전은 필자가 함부로 말하지 못할 방대한 양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개중엔 지식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지시적인 부분이 들어있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경전이 가진 핵심은 '지식'이 아닌 '지시'이다"라고 주장한다. 먼저 설명한 기록의 주체를 상기한다면 당연한 이치이다. 토템사회의 부족족장이 상대성이론의 공식을 받아 적을 수 있겠는가? 또한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라. 어떤 지식적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 사실이 알고 보니 어느 경전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던 적이 있는지. (세계의 미스터리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지만 학술적으로 증명된 사례가 없다!)

질문으로 회귀

앞서 우리는 과학과 종교간의 대립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얘기했다. 또한, 종교가 가지는 세계관, 즉 경전에 쓰여있는 종교의 우주론은 인간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이 하사하는 메시지는 당시 인간의 문화적 과학적 바운더리 안에서 쓰여진 '지식'이 아닌 '지시'라는 것을 얘기했다. 그렇다면 주제로 돌아가보자. 현대 물리학이 연구하는 우주의 발견과 신과의 연계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단 말이다. 일단 어떠한 종교의 경전이 가진 coverage도 현대 물리학의 논리에 대적할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쓰여있다고 정말 24시간 x 6 = 144시간 동안에 세상이 생겼겠는가? 성경은 비유의 집합체이다. 요일 별로 창조된 순서를 보면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진화의 순서와 그다지 상반되지 않는다. 8000년 전의 세상이 있었다고 해서 신이 몰락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반대로 신학계에서는 열린 생각으로 과학에 보다 유연한 자세로 대처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유념해야 할 사실

이번 편 역시 허무한 결말이지만 유신론자들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신은 창조자이다. 비록, 경전을 기록하는 선지자의 능력부족(?)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지는 못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지시'는 경전에 담겨있다. 과학에서 발견하는 복잡한 공식에 주눅들 필요가 전혀 없다. "What they achieve is what the God created" (그들이 발견한 것은 신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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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신의 존재성

서론

글을 적기에 앞서 이 시리즈는 되도록이면 Reference를 줄이고 쓰려고 한다는 점을 밝힌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신의 존재나 비존재에 대해 증명했던 적이 없으며, 따라서 다른 학자들의 글은 '주장'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서술하려는 것 역시 '주장'이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주장'이 이러하기 때문에 내 '주장'은 이러하다'라는 것보다는 내면적 고찰을 통한 '주장'을 중시하겠다는 얘기이다.

논란의 가속

신의 존재에 대한 논란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점점 뜨거워지는 논제이다. 통계자료는 없지만 고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에 대한 '의심'이라는 것 자체가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자연은 강하고 인간은 약했다.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의식주를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비참하고도 치열한 환경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신'을 구하게 된 '니즈'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겠지만..

불확실한 신의 존재? 확실한게 하나 있다.

현대 사회에서 거론되는 신의 존재 유무의 불확실성과는 다르게 과거의 모든 인류 문명에서 확실성으로 다가온 것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신을 섬기지 않은 고대 문명은 없었다." 만일, 고대 문명 중에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만으로 삶을 지탱하여 살자는 문명이 있었다면, 오늘날의 논쟁은 무신론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 본연의 탐구를 중시했던 그리스, 헬라문명에서조차 다양한 신들이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시작된 연도는 확실히 알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니체나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전에도 무신론적인 의견을 가진 철학가들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생각해보니 궁금해지는 주제다.) Anyway, 그 이후 20세기가 되면서 신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한 부류가 되었으며 종교인구의 감소와 함께 증가추세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무신의 이상상태", 그 정의

그렇다면, 만일 이러한 추세대로 수천년이 흘러 인류가 불확실성에 더이상 좌지우지되지 않으며 무신론자의 비율이 100%를 달성했다고 가정하면, 그 상황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필자의 생각은 Yes,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모든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 자체는 과거 본래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고, 신의 존재를 회자하던 원인과 현상이 모두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혹 무신론자중 일부는 개중의 어리석은(?) 인간들이 꼭 있기 때문에 100%가 될 수 없고, 이것으로 신의 존재를 역설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이것으로 신의 존재를 역설한다면 맞는 얘기겠지만, 필자가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글의 부제인 신의 존재성에 대한 양론 모두이다.

과거를 잃어버린 무신의 인류

다시 돌아가 위와 같은 세계에 우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아직 몇가지 요소가 더 필요하다. 그 미래 사회에 과거의 유물을 저장하던 컴퓨터가 고장을 일으켜서 자료가 모두 소실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대로 몇세대가 흘러 인간은 더 이상 과거의 유물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놀라운 과학의 발전으로 더 이상 다가올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며, 더 이상 발전을 위한 희생이 필요없는 황금비율의 순환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 '무신의 이상상태'에 대한 튜닝 작업이 필요하다. (세부항목생략) 야기될 수 있는 많은 불안 요소를 제거한 후에, 정말 이정도 전제하에서 인간이-진화 혹은 개조(!)를 통하여 인간 본연의 성질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신의 존재에 대해 다시 각성하는 일이 없을까? 당장은 어떤 책이나 정보매체를 통해서도 신의 존재와 간구의 기술에 대해 나와있지 않다면?

의문형으로 끝나지만 알게된 부분이 있다. 인간이 신을 간구할 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신의 존재와 역사를 잊고 있었다면 신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논제 자체가 성립되질 않는다. 설마, 기타 생물이나 원소등이 미립자 레벨에서 지능을 가지고 신의 존재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는 않을테니 '무신의 이상상태'가 성립되는 것이다.

허무한 결말

제목은 신의 존재성인데 '무신의 이상상태'만 정의하고 끝을 맺는다니 허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앞으로 필자가 펼칠 신과 인간의 관계도에서 매우 중요한 부품이 된다. 또한, 필자의 능력-이라함은 유물론적으로 혹은 영성의 깨우침으로 신을 증거하는 능력-으로 불특정 다수의 당신들에게 신이 존재에 대한 증명을 하는 것 역시 무리다. 차라리 위에서 언급한 미래사회의 가상 인류 중 한명이 되었다고 상상하고 내가 신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을지를 상상해보는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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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는 다양한 관심사가 있지만, 그중 요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과 종교이다. 어린 시절 맛나는 과자에 홀려 교회에 다녀본 적은 있지만 본인은 확고한 무신론자(atheist)였다. 과학에 심취했던 본인은 '갈릴레오와 다윈 vs 종교'의 격돌과 그들의 승리를 지켜보며 종교를 가진 이들은 과학에 대한 무지함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노방전도하던 개신교 신도들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 이후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은 후 지금은 평범한 개신교 신도로서 살아가고 있다. 종교에 대한, 신의 원론적인 부분과 특히 기독교에 대해선 넷상에선 가장 금기시되는 '칼로 물베기'류의 주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 혼돈의 주제에 감히 출사표를 던지고 싶다. 무신과 불가지, 그리고 종교인으로서의 변화 속에서 가지게 된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특히, 현대 종교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다. 딱히 종교를 전파한다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폭넓은 교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딱히 기획해서 만드는 시리즈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편에서는 기본적으로 논쟁할만한 아젠다를 정리해볼까 한다.

1. 신의 존재성

신은 존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을까? 신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은?

2. 창조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인가? 아니면 빅뱅이론으로 대변되는 과학님의 공식에 의하여 돌아가는 것인가?

3. 인간의 특수성

3.1. 지적생명체

지적생명체의 구분은 무엇일까? 돌고래의 IQ가 80이고 사람의 IQ는 100이라면 그저 20의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님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일까?

3.2. 존재의 의미

넓디넓은 우주의 스케일에서 인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반대로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4. 신의 계획

모든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록되어 있다는 신의 계획이란 무엇인가? 기도를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신의 계획과 인간의 의지는 어떤 상관 관계에 있는가?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신들의 계획은?

5. 사람들의 생각

현대 사회에서 바라보는 신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분류될 수 있을까? 과거와 현재의 종교의 위상과 의미는? 미래 종교가 지향하는 곳은?

이 시리즈에서는 '종교의 현주소'나 '비리문제', '도덕성', '선교', '전도는 왜 하나'등의 주제는 스킵하고 신과 인간, 그리고 종교의 원론적인 부분만을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고찰이라고는 하나 답이 없는 문제이며 필자 역시 개인적인 생각을 기술할 예정이므로 다소(혹은 다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예정입니다. 강한 태클? 당연히 환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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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거전을 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가 가지는 맹점을 총동원하여 국민을 설득하는 장면을 종종 보게된다. 일단, 양 후보의 선거 공약은 TV에서 디테일하게 보여지지 않는다. 오로지 국민의 세금을 얼마나 줄여줄 것인지를 홍보하기 위한 광고만이 주를 이룬다. '국민이 원하는'만을 극대화한 결과로서 정말 저 공약만으로 미국을 운영할 비전을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지난주 토요일, 존 맥케인 후보가 티나페이SNL쇼에 나와 보여준 QVC방송 퍼포먼스(?)도 '국민이 원하는(?)' 희화를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SENATOR JOHN MCCAIN - "Good evening, my fellow Americans, I'm John McCain.
매케인 - 안녕하세요. 맥케인입니다.

TINA FEY AS GOV. SARAH PALIN - "And, you know, I'm just Sarah Palin."
페일린(티나페이) - 에...아시다시피...전 사라 페일린이예요~^^

MCCAIN - "The final days of any election are the most essential. This past Wednesday, Barack Obama purchased airtime on three major networks. We, however, can only afford QVC."
매케인 - 마지막 선거일이 코 앞에 왔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오바마 후보는 방송3사의 시간을 모두 사서 유세를 했죠? 근데 저희는 여기 홈쇼핑QVC에 있네요..

FEY AS PALIN - "These campaigns sure are expensive.
페일린(티나페이) - 이 선거 캠페인은 진짜 비싼거예요.

MCCAIN - "They sure are. So tonight, we come before you to give you some final remarks on our campaign."
매케인 - 아 그럼요. 그래서 오늘밤에 우리 캠페인에서 마지막 이벤트를 하려고 합니다.

FEY AS PALIN - "And, as part of our agreement with the QVC folks, we're gonna try and sell you some stuff."
페일린(티나페이) - 그래서 QVC친구들의 허락을 받아서 저희가 물건을 좀 팔려구요.

MCCAIN - "This has been an historic campaign, so why not remember it with our line of collectible products. Such as ten commemorative plates that celebrates the ten Town Hall debates between Senator Obama and myself. They're blank, he wouldn't agree to those debates. Too bad. They're still nice plates.
매케인 -이번 선거는 역사에 길이 남을꺼예요. 그럼 이 역사적 사건을 길이 남기고 싶지 않으세요? 여기 제가 오바마한테 제안했던 10대 도시 경합 기념 접시는 어떠신가요? 10개 모두 비어있죠? 오바마가 경합을 거부해서 그런거예요;; 그래도, 괜찮은 접시예요.

FEY AS PALIN - "And who wouldn't want the complete set of limited edition 'Joe' action figures? There's 'Joe the Plumber,' 'Joe Six-Pack,' and my personal favorite, 'Joe Biden.' If you pull this cord, he talks for forty-five minutes.
페일린(티나페이) - 한정판 '조' 액션피규어는 어떠세요? 여기 '배관공 조'랑 '조 식스팩'과 제가 좋아하는 '조 바이덴'이 있습니다. 한번 줄을 당기면 45분은 연설한답니다.

후반부에 페일린이 자기 이름이 적힌 2012 선거 티셔츠를 몰래 파는걸 보면 완전 쓰러진다. 한국에서 대통령 후보가 이런 쇼를 했다면 어찌 됐을지는 안봐도 비디오일듯. 그만큼 미국은 '국민'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필하는 전략을 쓴다.

P.S. 방금 펜실베니아와 일리노이를 오바마가 차지했다는 뉴스가 나왔군요. 이젠 큰 이변이 없는한 오바마의 세상이 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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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질을 시작한지 근 몇년이 흘렀지만, 블로그 취지 상 혹은 사정상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개인적인 이야기 뿐만 아니라 소소한 생각이나 경험 등을 기록할만한 환경을 만들지 못했다. 혹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왜 일기장에 쓰지 않고, 만인이 볼 수 있는 인터넷에-그것도 올블 등에 신디케이션을 건채로-올리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실제로 필자가 그런 비판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올블에 낚시 제목을 단채로 자극적인 글이 올라오면 관심을 받고싶어 안달이 난 환자 취급을 하곤 했으니. 하지만 어쩌랴 인간지사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다른 사람과의 유기관계를 통해서야 비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을.. 다만 바라는 것은 부족한 나의 지식을 빛내려하거나 공명심 없이 나의 모난 부분을 네트의 흐름속에서 발견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장으로서 활용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리플은 어떤 종류든지 환영합니다. 악플이건 선플이건 결국 제 생각에 대한 의견으로 받아들여야죠. 익명의 공간이라 광고가 아니면 그닥 리플 청소도 필요없구요.

- 어느 카페 구석진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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